길 찾아/성지

요골공소

Paul kim 2007 2015. 1. 26. 07:39

위치 : 공주시 유구읍 명곡리 195번지

관할성당 : 유구성당

공소회장 : 현 공소회장 (구본길 명곡리 이장)

130여 년 전 천주교인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살면서 미사를 보았던 ‘요골공소’가 있다.

조선 말기인 1866년(고종 3년)에 발생한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년(고종 3년)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정권의 대규모의 천주교 탄압) 이후 박해를 피해 각지에서 모여든 천주교 신자들이 지금의 명곡리인 요골에서 교우촌을 형성했고, 요골공소는 1883년 프랑스 선교사 두세(Doucet) 신부가 충청도 지역을 순회하면서 충청도 최초의 공소로 설정됐다.

 

 

이듬해 1884년 이화진(베드로)이 초대 공소회장으로 부임했고, 1897년 5월 8일 공주본당이 설립된 뒤 초대 신부로 임명된 프랑스의 기낭(Guinnand) 신부가 임시 사제관으로 사용했다.

이처럼 천주교인들이 유구로 몰려든 것은 아마도 정감록의 영향을 받은 때문인 듯하다. 유구는 『정감록』의 「감결」에 나오는 몸을 보전할 땅이 10곳 가운데 한곳이기 때문이다.

요골공소는 1913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한 뒤 1938년 공소 건물 완공, 광복 후 지붕 개량과 종각 설치, 성모상 안치 등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요골공소 사람들은 1883년 프랑스 두세(정가밀로)신부 때부터 배실 산막공소내 집 뒤골에서 부터 시작된 공소를 신앙의 고향으로 깊은 의미를 두고 고향인 공소를 소중히 여겨 보다 잘 보존하고 가꾸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소중한 기억과 귀중한 옛것들을 적어두고 모아두어 기억을 새롭게 하여 후세에게는 보다 더 생생하게 남겨 주려는 뜻을 담았으며 고향의 공소를 몸과 마음 영혼의 고향으로 영원히 간직하려고 하고 있다.

요골공소 사람들은 요골공소 진입로 포장, 1994년 설립 111주년 행사, 2003년에는 공소보존차원의 중수작업과 공소설립 12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하기도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구본길 명곡리 이장(현 공소회장)은 “명곡리에는 80%이상의 주민들이 천주교인들”이라며 “지금의 요골공소는 유구본당 관할로 공소에서는 미사가 없지만, 옛 공소 모습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전에는 신자들이 주일이면 함께 모여 공소 예절을 행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교통이 발달해 본당으로 미사참례를 가게 됐고, 공소는 ‘구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에 “역사적인 요골공소를 지키기 위해 주민들 나름대로 공소를 정비했고, 지난해에는 화장실을 새로 고치는 등 노력을 했으나 역량이 부족했다” 고 밝혔다.

또한 “요골공소유지관리 및 마을발전을 위한 대안으로 마을기업 등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으나 어려운 점이 많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며 “마을에서 재배되는 콩으로 메주, 된장, 간장 등을 만들어 판매기금을 모으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때는 신자수가 무려 158명에 이르는 등 유서 깊고, 번창했던 이곳이 잘 보존돼 지금도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는 것은 명곡리 주민들의 부단한 관심과 노력의 결과이다.

요골공소에서는 광복 후 1947년 10월 첫 사제 서품식을 거행한 뒤로 여러 명의 신부와 수녀, 수사가 배출됐으며, 특히 구씨 성을 가진 신부와 수녀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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